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론 음모론 (문단 편집) === 남인에 대한 지나친 미화 === 노론-서인 세력과 대립관계였던 남인 세력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움직임도 있다. 주된 근거가 [[정조(조선)|정조]]를 근대 개혁 군주로 설정하고, 남인이 이 정조의 정치적 파트너였으며 정조가 독살당하고 남인이 축출당하면서 조선이 막장 테크로 흘렀다는 것. 조선 후기 실학자 중 일부(ex:[[정약용]])가 남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인 전체가 [[실학]]을 위해 노력한 집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부류가 [[이문열]]과 [[이인화]]다.[* 이문열은 재령이씨, 이인화(류철균)는 전주류씨, 모두 영남 양반 집안, 즉 남인의 후손이다] [[이인화]]는 아래에 언급될 <영원한 제국>이란 작품을 집필했다. 사실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게, 운 좋게도(?) 조선이 막장이 될 무렵 남인 또한 제대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침 대중들에게 존경받는 [[정약용]]이 남인이고 '겉보기에는' 이 노론 벽파 세력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목민심서]] 등의 저서를 남기는 업적을 세웠으니 남인 세력을 미화하기엔 더더욱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노론 음모론자들의 망상과는 달리, 정작 그 노론의 핵심인물들인 [[심환지]]나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등은 [[정약용]] 일가에게 매우 우호적이었고 정조에게 그의 재능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신유박해]]에 연루되어서 정약용이 처벌을 받을 때에도 최대한 그를 비호해주었다. 정약용이 귀양을 간 것은 노론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냥 서용보와의 개인적인 악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인과 정약용이 딱히 진보적인 입장도 아니었다. 조선 후기 300년간 조정에서 시행, 제기된 제도 개혁론은 모두 근본이 서인 율곡 이이에게 있으며[* 대공수미법, 군포 개혁 등을 주장했고, 이는 후대에 대동법/균역법/호포법과 같은 제도로 실현된다.] 다수의 소작농을 거느리고 농장을 경영했던 서인 쪽이 중소지주들이 대부분인 남인보다 신분제 완화와 노비 수 감소 정책에 훨씬 적극적이었다. 노비종모법을 거론했던 송시열은 수구꼴통이고 일천즉천을 주장한 정약용은 진보의 상징인가? 그뿐 아니라 서인 세력은 소현세자 가족과 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민회빈 강씨 일가에 호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민회빈 강씨의 신원도 주청했다. 심지어 원손을 그대로 세손으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고, 민회빈 강씨의 사사에 반대한 것도 대부분 서인 대신들이었다.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주청한 사람이 김자점이고, 그 사람이 서인이기는 하지만 김자점은 서인 세력에서도 대부분 싫어했던 자이다. 당시 서인의 비주류(비당권파)였던 청서파에서는 당연히 김자점을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고, 그뿐 아니라 서인의 주류(당권파)였던 공서파에서도 김자점을 싫어하는 자들이 엄청 많았다. 그리고 오히려 남인 세력은 일부를 빼고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민회빈 강씨 일가의 신원에 소극적이었다.[* 이는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과 손자인 동평군이 서인 세력에게 탄핵을 받은 이유도 한 몫을 했는데, 강빈옥사를 일으키는 데 일조한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과 손자인 동평군은 남인을 편들었다.] 예송 논쟁 때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세력이 1년/9개월을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인 세력이 생각하기에 일단 소현세자의 가족이 존재하는 이상,도저히 명분상 효종의 정통성이 완벽하다고 주장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또한 서얼허통에 앞장서고 서얼금고법 폐지에 앞장선 사람들도 송시열, 김수항 등의 서인들이었다. 또한 노론의 핵심 중진인 서포 김만중은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흔히 조선 후기의 개혁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실학]]의 주요 인사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서인-노론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중상학파]]-[[북학파]]는 서인-노론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은 노론 중에서도 명문가로 꼽히는 [[반남 박씨]] 집안이며, [[홍대용]] 역시 노론 학파에서 사사한 인물이었다.[* 박지원과 홍대용이야말로 정말 노론 중에서도 엘리트 집안 출신이다.] 자세한 내용은 실학 문서를 참조하자 물론 남인들도 집권 시절에 상평통보, 호포제, 대동법, 만과 실시, 독륜거 제작, 승병 조직, 과거제 폐지 등의 제도개혁을 실시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호포제와 대동법은 서인들도 많이 추진하거나 찬성했다. 또한 남인인 윤휴가 내놓은 제도개혁 중에 독륜거 제작, 과거제 폐지 등은 현실성이 없어서 같은 남인에게도 까였고 윤휴가 사치를 금한답시고 관을 열어놓은 행위는 적을 양산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윤휴 자신은 대동법을 반대했다. 또한 같은 청남인 허목도 호포제를 반대했다. 그리고 윤휴가 한 개혁안들은 남인들이 내놓은 게 아니라 윤휴 단독으로 내놓은 것이다. 또한 그 개혁안들도 주로 남인이 1차로 집권하던 때만 나오던 것이지, 남인이 2차로 집권할 시에는 오로지 개혁은 소홀히 하고 변화를 이끌지 못했으며 오로지 민암과 외척인 장희재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왕의 예스맨 노릇만 하고[* 물론 이건 지나치게 환국을 해대는 바람에 붕당의 상호 견제를 무력화시켜버린 숙종 잘못이 더 크긴 하다. ] 낙하산 인사와 코드 인사를 계속 일삼다가 몰락을 자초했다. 즉 결론을 내리면 남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개혁적인 성향도 아니었으며, 서인-노론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구꼴통이라고 볼 수도 없다는 얘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